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콤 엑스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external/www.inflexwetrust.com/ali-and-malcolm-x.jpg]]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이 사진 말고도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찍은 사진은 꽤 많다. [[마틴 루터 킹]]은 1950~6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지만, 말콤 엑스는 그에 비해 대접을 좀처럼 받지 못하는 편이다. 그 이유로는 흑백의 통합과 공존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도 인종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마틴 루터 킹에 비해 말콤 엑스는 성지순례 이전까지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론을 지나치게 주장했던 탓이 크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들어가서 급진파로서 활동한, 다소 과격한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킹에 비해서 엑스는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도 꽤나 적은 편이다. 사실 그때 당시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정부적인 인종차별과 심각한 [[린치]]로 인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급진적인 주장이었기에 후속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의 급진론은 여러 흑인 무장투쟁 단체에 영향을 많이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흑표당]]이 있다. 그의 주장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에 그쳤을 뿐,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해 결과적으로 흑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총체적이고 대국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물론 흑인이슬람주의 운동의 순수성에 집착한 것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격한 [[흑인우월주의]]의 씨앗은 말콤 엑스가 뿌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그의 인생 후반기에는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연대론과 포용론을 주창하기 시작하는 등 인권운동 노선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그의 남은 생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거기에다가 말콤 엑스가 급진적인 운동을 전개한 이유도 흑인과의 공생을 거부하고 대화조차 차단하던 당시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 탓도 컸다. '평등하지만 다르게' 란 명목으로 미국 사회는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를 오랜 시간동안 격리하고 분리시켰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사상과 인물들이 희박했던 탓에 결국 말콤 엑스의 폭력적이고 흑인우월주의적인 '혁명론'보다는 평화주의적이고 인종주의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집중했던 마틴 루터 킹의 '인권운동론'에 더 기울였다. 그래도 나름의 긍정적인 면을 언급하자면 열등감과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흑인들에게 흑인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고 대도시 빈민가 흑인의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모순점에 대해 지적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20세기 초반 부터 소수의 흑인 신비주의 계열 지식인들이 간접적으로, 어설프게나마 [[이슬람]]과 접촉하면서 발달시켜 온 북미 흑인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흑인 대중에게 설파하며 북미 흑인이 스스로를 본격적으로 또 하나의 민족으로 여길 수 있는 자긍심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그의 활동이 지속되었다면 구 전통시대의 제한된 정보에서 비롯된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면을 완전히 벗겨내고 실제로 하나의 성숙하고 자각심 있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흑인 무슬림들이 더욱더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을 거란 평가도 있다. 또한 킹의 후반기 운동이 더 적극적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현대에 와서 두 인물 양쪽 다 각자의 방식으로 걸출한 위대한 민권 운동가이자 해방자였다는 평가가 대두되면서 킹과 말콤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양쪽 다 말년에 갈수록 서로 공감하고 어느 정도 노선을 공유하게 되는 공통점에 더 주목을 두고 있다. 말년의 킹은 민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이념을 확고히 하며 비폭력적이만 확실하게 미국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적인 면과 단절하는 사회적 혁명을 주장했고, 말콤 엑스 또한 사망 전엔 단순한 백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전인류적 인종간의 연대를 부르짖었다. 배우 오시 데이비스는 추도사에서 엑스를 "빛나는 검은 왕자"라고 표현했으며, 유명한 복싱 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는 말콤 엑스가 당시에 펼친 이슬람 운동에 영향을 받고 감화받아 이름을 무슬림식으로 바꾼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다만 무하마드 알리는 말콤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떠나고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비난하자 사이가 벌어져 교류가 끊긴 적이 있었으나 훗날 말콤 엑스의 사망 후 그의 진정성을 깨닫고 오해를 풀었다고 했다. [[유시민]]은 자신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차별의 한계에 너무나도 높이 날아간 "검은 [[이카루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말콤 엑스는 연설 중에 [[이승만]] 정권에 [[4.19 혁명|항거하여 싸운 한국의 학생들]]을 언급하며 여러 번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그가 아직까지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청렴하고 깨끗한 사생활이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활동 확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수많은 열성추종자들을 거느렸지만, 어떠한 추문도 없었고 대부분의 수입을 교단에 기부했다고 한다. 말콤 엑스가 죽고 난 후 가족에게 남긴 돈이 없어 거주하는 집이 경매에 넘어갈 뻔한 적도 있었는데, 추종자들이 돈을 십시일반 모아 막았다. 종교 지도자는 부패에 빠지기 쉬운 자리다.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인 루이스 파라칸만 해도 말콤 엑스가 빠진 후 위기에 빠진 종단을 부흥시켰다며 몇 개의 호화 주택과 수대의 고급 자동차, 거액의 현금을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그 인격자 마틴 루터 킹조차도 몇 건의 불륜 의혹 때문에 FBI에게 협박을 받기도 했다. 반면 말콤 엑스에게 이런 사례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말콤 엑스의 재평가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백인 권력층을 비호하며 보수주의를 내세운 레이건과 부시 아래 미국 밑바닥에서 박탈감을 느끼던 흑인들이 말콤 엑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기 영화가 나온 이유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